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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소개

인물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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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독립운동의 선구자

3)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은 저 유명한 구국의 명신 백사공(白沙公)의 10대손이다. 아시는 바와같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공은 임진왜란 때에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으면서 끝까지 이 땅에서 왜적(倭賊)을 몰아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으로서 임진, 정유의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뒤에 선조대왕께서 “종사(宗社)가 한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참으로 모든 대신들이 한 몸이 되어 애쓴 공로에 의함이지마는, 반드시 그 공로의 순위를 따지기로 한다면 그 첫 번째의 공훈은 부득불 경(卿)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宗社還于舊都只是賴諸卿力爾諸卿誠同功一體然必欲論首功不得不歸之卿耳)”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다. 백사공의 가문은 그 유례가 없을 만큼 번창하여 10대손인 성재선생에 이르기까지 부통령 1인, 영상(領相) 6인, 그리고 3인의 문형(文衡)을 배출한 명문이다. 성재선생은 우찬성(右贊成) 유승(裕承)공과 동래정씨(東來鄭氏) 사이에서 7형제 중 5자로 태어났다. 초취(初娶) 부인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따님이였으나 일찍이 사별하셨고 재취 부인도 만주의 독립투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7세에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출사(出仕)하여 2년 뒤인 19세에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2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다음 요직을 거쳐 26세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에 이르고 을미년(乙未年. 단기4228.서기1895)에 왕명으로 청일전쟁의 ‘관전사(觀戰使)’가 되어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여순(旅順), 대련(大連) 등 전투현장을 시찰하였다. 38세에 엄친의 기세(棄世)로 거상(居喪) 중에 평안남도(平安南道)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그 다음해에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에 이르렀으며 종2품 태극팔괘장(太極八卦章)을 받았다. 을사조약(乙巳條約. 단기4238. 서기1905)이 체결되자 나라의 위기를 직감한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었는데, 그 주요 멤버는 선생을 위시하여 이회영(선생의 4째형),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양기탁(梁起鐸) 등이었고 서울의 상동(尙洞) 공옥학교(攻玉學校)에서 만나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숙의(熟議)하였다. 헤이그 정사로 이상설(李相卨)공을 파견할 것을 건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고 일본의 노골적인 박해를 피하여 해외로 나가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다. 드디어 이회영, 이동녕, 장우순(張祐淳) 등 세분이 경술년(庚戌年. 단기4243.서기1910) 봄에 남만주를 답사하고 독립운동의 활동무대로 안동(安東), 환인(桓仁), 유하(柳河), 통화(通化)를 지정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해 8월 29일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나라가 망하니 이분들의 예측이 적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가 넘어가게 되니 한 나라의 진신(縉紳. 고관)이라는 것들의 추태가 가관이었다. 어떤 부류는 금품에 매수되어 함구하거나 또는 작위(爵位)를 받고 매국(賣國)에 동조했으며 이른바 유림(儒林)의 논객(論客)이라는 부류들도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적에게 빌붙거나 은둔하는 등 조야가 모두 패배주의로 기울 때에 우당선생과 성재선생의 6형제는 전 가족을 분연히 솔가(率家)하여 만주로 망명한 다음 구국투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던 해 12월에 전 가족 40여명을 6~7조로 나누어 용산, 남대문, 장단(長湍) 등의 기차역에서 차례로 차를 태우고 만주로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일본경찰의 검색이 심하므로 한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를 타고 건너 안동에서 며칠 쉬고 다시 환인을 거쳐 유하에 도착하여 비로소 짐을 풀었다. 누구 하나 반기는 이 없는 타국, 살을 에이는 만주벌판에 정착한지 2년 만에 어렵사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를 설립하였는데, 이해에 선생의 둘째형 석영(石榮.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에게 입양됨)공이 1만여 석의 가재(家財)를 방매하여 가지고 오니 그 자금으로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넓은 대지를 새로 매입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무관학교를 세웠으며 주변의 3~4 곳에 분교(分校)를 설치하여 10여년 동안이나 인재양성을 하게 되니 만주 일대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3,0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의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이 선생을 일러 “무관(無冠)의 제왕(帝王)” 이라고 추겨 세운 뒤에 “만주 일대의 살인강도의 두령” 이라고 대서특필하기에 이른 것이다. 홍범도(洪範圖)의 지휘 아래 왜군 100여명을 사살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의 통솔로 수1,000명의 왜군을 섬멸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에 의한 대첩(大捷)이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기미년(己未年. 단기4252.서기1919) 1월에 고종황제가 독시(毒弑)되었다는 소식에 전 민족이 통곡하고 있는데, 마침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하였다는 외신(外信)을 접한 선생은 “이 기회에 국내외의 동포들이 ‘독립, 자존’을 외치며 떨쳐 일어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북경(北京)에 있는 중형(이회영)의 집에서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등과 함께 3·1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국내외에 알렸으며 얼마 뒤에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 현순(玄楯)을 이끌고 북경의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 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려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창설하고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의정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때의 임시정부 조직과정에서 지출된 모든 경비가, 고종황제께서 시해되기 전에 비밀리에 이회영선생에게 하사하신 5만원 중에서 지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무인년(戊寅年. 단기4271.서기1938)에 장개석정권(蔣介石政權)이 중경(重慶)으로 옮기자 임시정부도 함께 이사하게 되어 선생은 이때부터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번갈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명맥유지에 진력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 구국투쟁에 여념이 없던 계유년(癸酉年. 단기4266. 서기1933) 여름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황염배의 ≪조선(朝鮮)≫이라는 신간(新刊)을 보고 거기에 쓰인, “조선족은 미개(未開)한 종족인데 일본이 지배하게 되면서 일본의 교화(敎化)에 의하여 비로소 문명한 민족이 되었다”는 내용을 읽고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으셨겠는가. 이런 연유로 선생은 항일투쟁의 와중인데도 1년 가까이 항주의 여관에서 한민족(韓民族)을 모독한 황염배의 글을 통박(痛駁)하고 더불어 세계를 향하여 <한민족의 위대성>을 펼쳐 보임으로써 한민족의 긍지(矜持)를 제고시키고자 피맺힌 글 ≪駁黃炎培之韓史觀≫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을유년(乙酉年. 단기4278.서기1945)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한민족은 36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으나 그것이 남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뜻하지 않았던 불행한 사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든다면, 우선 국토의 분단이 그 첫 번째이고 이로 인하여 야기된 민족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골육상쟁의 참상을 지적할 수가 있으며 그 두 번째의 커다란 비극이 점령군인 미군사령부에서 ≪임시정부≫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통고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기쁨보다는 조국으로부터 날아오는 실망스런 소식에 탈진이 된 채 귀국 길에 올랐는데, 마침 장개석총통 부부가 비행기를 주선해주고 몸소 나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환송하는 가운데 선생도 이해 겨울에 중경을 떠나 상해에 닿았고 여기서부터는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로 환국했으나 점령군의 요구대로 임시정부는 해체되고 정부요인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해방된 고국에 돌아와서 성균관 총재에 추대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사분오열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보고 서기1947년(단기4280년) 9월에 대종교(大倧敎)의 대표직만 빼놓고 일체의 공직에서 탈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선생이 80세가 되던 1월에 ‘5.10 총선’ 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고, 3월에 군정장관 하지의 방문을 받고 한국이 처한 현실과 장래에 대하여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7월 3일에는 국회 본회의에 나아가서 198명의 민의원에게 “국호(國號)를《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하고 그 필연성을 역사적 사실을 들어 역설하였다.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이 통과되고 16일 정부조직법이 가결되면서 20일에는 대망의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선생이 당선되었는바 득표수는 132표였다. 선생은 부통령에 당선된 뒤에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 대통령선서식은 이미 취임식장에서 경과하였으나 국조단군(國祖檀君)께 드리는 경봉(敬奉)의 절차가 없을 수는 없지 않소” 라고 하여 단군성전(檀君聖典)에 고유(告由)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일은 비록 조그마한 사건 같이 보이지만 장차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바로 세울 때에 중요한 기맥(起脈)의 역할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면서 선생의 민족적 정통성에 대한 집념을 확인할 수 있는 단면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서기1951년(단기4284년) 5월 9일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부통령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하고 국회에 사표를 제출함과 동시에 저 유명한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회에서는 2일 후에 만장일치로 사표를 반려했으나 13일에 다시 제출하므로 할 수 없이 수리하였다. 이로부터 1년 후에 선생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민주세력과 국민의 여망을 거부할 수 없어서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고 대국민성명을 발표한다. 서기1952년(단기4285년) 7월 27일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선생은, “이제 내가 목적으로 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하나입니다. 그것은 특권정치를 부인하고 민주정치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여 독재, 부패정권 타도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으므로 언론도 [이 이상 4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선생의 선거슬로건을 대서특필하여 독재와 부패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한 가닥의 꿈을 안겨주었으나 이승만 일파의 공작에 의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선생은 85세 되시던 서기1953년(단기4286년) 4월 15일 새벽 2시경에 동래(東萊) 온천의 우사(寓舍)에서 영면하셨다. 장례는 전 국민의 애도 속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명예위원장에 부통령 함태영(咸台永), 위원장에 민의원 의장 신익희(申翼熙), 부위원장에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국무총리서리 백두진(白斗鎭) 등 국무위원 전원과 각계의 유지가 모두 참예하였다. 선생은 일생을 화랑의 ‘세속 5계(世俗五戒)’를 애송(愛誦)했으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공직에 종사하는 자는, 공로는 남에게 돌리고(功歸于人), 허물은 내가 받는다(歸咎于身)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고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초취부인을 잃고 만주로 망명 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또 상처를 당한 42세 이후에는 다시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지구 위에 망한 나라도 많고 애국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마는 6형제 40여명의 전 가족이 솔가하여 구국투쟁에 몸을 던진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1만여 석의 가산을 방매하여 무관학교를 짓고 독립군을 직접 길러냈으며 모진 고난 속에 시달리던 애국자들을 보살피면서 만주에서의 항일투쟁도, 중국에서의 임시정부도 모두 선생과 우당선생을 비롯한 6형제분들의 도움에 의하여 부지해나갔던 것이니 그 쓰라렸던 고난의 길, 36년의 피맺힌 세월을 누가 있어 선생과 우당선생 그리고 나머지 4형제분들과 그 가족의 혈성(血誠)에 견줄 수가 있을 것인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레즈의’ 전통적 표상이라고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