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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소개

인물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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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독립운동의 선구자

1)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이상설(相卨)은 서기 1870년~1917에 출생하였는 바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충북 진천(鎭川) 출신으로 행우(行雨)의 장남이며 7세 때 용우(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불어를 익히고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고종 31년(서기 1894) 문과에 급제하고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만한 학자라는 평을 받았다. 2년 후에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탁지부 재무관 등을 거쳐서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상소 곧 [일인요구 전국 황무지 개척권 불가소(日人要求 全國 荒蕪地 開拓權 不可疏)]를 올렸는데 고종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과 법부협판에 보임되고 11월초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에 올랐다. 1905년 11월에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 등 5적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려할 때 공은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였으므로 회의에 참석하여 조약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제지로 끝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을사조약은 강제로 체결되었으나 고종이 인준하지 않았음을 알고 공은 5적을 즉시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나아가서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의 원로대신을 소두(疏頭)로 하는 백관반대상소(百官反對上疏)와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리도록 주선하였다. 11월말에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로 나와서 울면서 “민족의 궐기와 결사항일투쟁”을 호소한 다음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06년 봄에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8월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월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되었다. 이때에 공이 정사(正使)였고 부사(副使)로는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이 보좌했다. 일행은 현장에 도착하여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본의 간악한 선동에 의하여 회의에 참석조차 거부되는 참경에 이르렀으나 공은 대한제국의 현황과 주장을 밝힌 성명서 ≪공고사(控告詞)≫를 헤이그에 모인 세계 각국의 대표에게 보내는 등 국권회복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일행 가운데 이준은 불행하게도 숙환(宿患)으로 현지에서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뒤에 헐버트·이위종·송헌주(宋憲澍)·윤병구(尹炳球) 등을 대동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역설하였고 더불어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국활동을 문제삼은 일제는 그들의 주구(走狗)들을 시켜서 국내에서 공을 궐석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1908년에는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조야에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각지에 산재해 있는 교포들을 규합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끌어올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한 결실로서는 동년 8월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를 꼽을 수가 있고 이듬해 4월에 열린 [국민회 제1회 이사회]를 들 수가 있다. 이때에 공과 함께 재미교포의 애국운동을 위한 조직화사업에 동참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만(李承晩)과 국민회 총회장 최정익(崔正益)이었다.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공은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더불어 항카오(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의 땅 45만방(方)을 구입하여 한인 교포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한흥동(韓興洞)”이라고 명명하여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였다. 이어서 국내외의 의병들을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1910년 6월에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회동하고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국내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의 편성을 아뢰고 군자금을 내려줄 것과 망명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8월에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교포를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9월에 일본의 음모에 넘어간 러시아가 공의 일행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기 때문에 함께 쫓겨 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김학만·이종호(李鍾浩)·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권업신문≫의 주간을 함께 맡기도 했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정재관(鄭在寬)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의 장교를 양성하였다. 이듬해에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모두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하고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었다. 1915년 3월 중국 상해(上海) 영국조계(英國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한참 일할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구국(救國)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