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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고려 인종 때에 도교(道敎)의 도사(道士)인 중약(仲若)은 임금을 달래어 궁중에 복덕궁(福德宮)을 신설하게 하여 왕실에 도교(道敎)를 받아들이게 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의 법을 중국의 송나라에 전한 최초의 거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천주교의 전파에 공헌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창립자인 이벽(李檗)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맹자봉 기슭 천진암(天眞庵)에서 권철신·일신(權哲身·日身)형제, 정약전·약종·약용(丁若銓·若鍾·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熏)등 10여명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학문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믿음으로써 서교(西敎, 天主敎)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 천주교회의 출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이 천진암(天眞庵)강학회를 시발로 1785년 숨질 때까지 7년 동안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1785년 1월 그는 서울 명례(明禮)방(현 明洞)에 사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寓)의 집에서 권철신·일신형제,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등 신자들과 예배를 보다 붙잡혔다. 그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으로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이르고 야단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이벽(李檗)은 신앙과 효도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끝에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식음을 끊었다. 기도와 독서만으로 버티기 10여일 만에 탈진한 그는 쥐통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잊혀진 그의 묘소를 포천(抱川)에서 찾아내 발굴, 천진암(天眞庵) 아래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칼날 아래의 순교보다도 더 거룩한 순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의 맥을 이은 규채(圭彩)와 광복 후까지 대종교의 대표로 맥을 잇고 교리를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성재 시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에서는 근년에 명성을 떨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 성철(性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