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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소개

인물론1

경주이씨중앙화수회에 오신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 종중을 빛낸 거인(巨人)들

1) 절의(節義)·염결(廉潔)의 가풍(家風)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가통(家統)에 한 특징이 있으니 겸양이 남다르고 처신에 엄격하여 청백(淸白)과 절의(節義)의 가문이었다. 조선조에 53명의 청백리(淸白吏)가 녹선되었다. 이항복(李恒福), 이수일(李守一), 이유태(李惟泰), 이경일(李敬一), 이 지(李知) (세종조), 이정보(李廷) (세종조) 는 청백리였으며 이존오(李存吾), 이시영(李始榮)은 절의로 유명하다. 고려조의 절의지사(節義志士)로는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와 역시 고려말의 충신 이조(李)를 들 수가 있다.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쳐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했다.

역시 고려말의 충신 이조(李)는 검교정승 송암 세기의 제4자이고 국당 천의 막내동생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에 이르렀을 때에 고려가 망하므로, 모두 고려를 등지고 신왕조로 발길을 돌리는데 공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안고 전라도 함라에 있는 갓점산에 은둔하였다. 공은 그 산속에 서실(書室)을 짓고 거기에서 독서도 하고 지금은 없는 고려사직의 원혼들을 달래며 제향을 지냈다고 한다. 밖에 나온 일이 없으므로 초근(草根) 목피(木皮)로 목숨을 이을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마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가리웠으며 무엇을 덮고 어디에서 잤을까? 세속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자연의 삶속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30유여년을 보내다가 표연히 자취를 감추었으니 실로 만고의 충신이 아닐 수가 없다. 공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어서 뒤에 후손들이 그 산 아래에 단(壇)을 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말(韓末)에 공의 단(壇) 앞에 세운 비의 표면에는 ≪해동수양(海東首陽)≫이라는 표제가 새겨져있다. 세인들은 공이 은둔한 이 산을 백이숙제(伯夷叔齊)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중국의 수양산(首陽山)에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