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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소개

인물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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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익재공(益齋公)과 고려의 존망

[국보로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
이제현(李齊賢. 충렬왕 13(서기1287)~공민왕 16(서기1367))은 고려말의 정치가이며 성리학자였고 원(元)의 위협속에서 기울어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혼자서 버텨낸 위인이었다. 자는 중사(仲思),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검교정승 진()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서기1301)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문과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다. 성균악정에 이르렀을 때에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부르므로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의 명사들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심오해졌으며 이 때에 진감여(陳鑑如)가 공의 초상화를 그렸고 원(元)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이 그림과 글씨가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되어있다.

충숙왕 10년(서기1323)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省)으로 만들어달라”고 원나라에 간청하니 원나라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고려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온 조정이 들떠서 후속조치에 여념이 없는데 공은 분연히 일어나 도당(都堂. 원나라의 의정부)에 글을 보내서 고려 400년의 사직(社稷)이 이로써 무너진다고 개탄하고 유청신 등의 청원이 부당함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여 고려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위급을 구하였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뒤에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가게 되자 함께 따라갔으며 가고 오는 과정에서 밀직사사·첨의평리·정당문학·삼사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다.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정승 조적 등이 심왕(瀋王) 고(暠)와 공모하여 모반하다가 잡혀죽자 그의 무리들이 연경(燕京)에 남아서 충혜왕을 음해하므로 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잘 무마하였으며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우정승을 맡고 정동성사를 겸하였다. 그후 원종공신 조일신(趙日新)이 시기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뒤의 ‘조일신의 난리’에 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6년( 서기1357)에 벼슬을 떠났고 왕명으로 고려의 실록을 수찬(修撰)하고 종묘와 위패의 서차(序次)를 정했으며 사후에 공민왕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낙옹비설』·『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공은 당대의 문호(文豪)였으며 『익재난고』 소악부(小樂府)에는 당시의 민요 17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문학계에서 고려시대의 가요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