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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소개

시조이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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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중흥조(中興祖) 열헌공(悅軒公)과 두 편의 하시(賀詩)

6) 계자(季子-막내아들) 세기(世基)의 후손 3자 상서공파의 [오신(五臣)집]과 [백사(白沙)집]

가.오신집
송암공(松巖公)의 3자 과()는 고려말에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나 이태조에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공훈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과()의 5대손 성무(成茂)는 안동판관, 증 이조판서였고 5자를 두었는데, 인신(仁臣)·의신(義臣)·예신(禮臣)·지신(智臣)·신신(信臣)이었으며 모두 이름을 떨쳤으므로 세인들이 [오신(五臣)집]이라고 불렀다. 인신(仁臣)은 지의금부사에 이르고 증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역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장자 몽린(夢麟)은 수군절도사·병마절도사를 거쳐서 포도대장. 지돈녕부사에 이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종~명종대의 ‘명장(名將)’으로 이름을 떨쳤다. 몽린이 지돈녕부사로 있을 때 명종(明宗)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친히 관람하시는데 매가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임금의 거처)의 위를 맴돌아 날면서 차려놓은 어선(御膳. 임금이 드시는 음식)을 노리므로 임금이 매우 싫어하여 “매를 쏘아 떨어뜨리라” 하니 한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이몽린(李夢麟)만이 쏠 수 있아옵니다.”하였다. 몽린(夢麟)이 명에 따라 임금 앞에 나와서 여쭙기를 “매의 어디를 쏘리까?”하므로 임금이 괴이쩍게 여기고 “매의 등을 쏘아보라.”하였다. 그러자 공이 화살 두 대를 시위에 먹이어 연거푸 쏘았다. 한 대가 매의 오른쪽 날개를 맞히는 순간에 놀래어 몸을 뒤집으니 다음 화살이 등에 꽂히었다. 매가 땅에 떨어지므로 주어다가 살펴보니 과연 화살이 등에 꽂히었다. 임금을 위시하여 이 광경을 본 신료(臣僚)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몽린의 큰 아우 몽기(夢麒)는 통정대부였고 둘째 아우 몽원은 병마절도사·어모장군이었으며 셋째 아우 몽서(夢犀)는 청도군수(淸道郡守)였고 넷째 아우 천휴당(天休堂) 몽규(夢奎)는 반궁(泮宮. 국학(國學) 곧 성균관)에서 수학(修學)할 때 어린 유생들이 핏대를 올리며 논쟁하는 것을 보고 환로(宦路)의 꿈을 접고 보령(保寧)으로 낙향하였는데 얼마 뒤에 인종(仁宗)이 승하하므로 애통하였고 고고한 선비로 수석(水石)을 벗삼고 지냈다. 사후에 율곡(栗谷)이 시장(諡狀)을 지었다. 경종(景宗) 1년에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하고 사액(賜額)했으며 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다. 몽린의 손 용근(庸謹)은 군자감정이었고 현손 문재(文在)는 문과에 들어 안악군수(安岳郡守)에 이르고 문빈(文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였으며 5대손 세현(世賢)은 문과에 든 뒤에 예조좌랑에 이르렀을 때에 기주(記注)에 뽑히었으나 당시의 재상의 미움을 사서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내쳐져 임지에서 죽었다. 세현은 일찍이 유생으로 율곡(栗谷)·우계(牛溪)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공박하는 봉장(封章)을 올렸고 기사화(己巳禍)에는 숙종의 왕비 폐출(廢黜)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린 강의(剛毅)·충절(忠節)의 인물로 옥구(沃溝)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5신 가운데 둘째인 의신(義臣)은 진사로 불사(不仕)하였으나 5대손 수종(秀宗)은 병자호란 때에 3학사와 함께 호지(胡地)에 끌려가서 매운 위국단충(爲國丹忠)을 보이었고 그의 손 천복(天福)은 원종공신으로 어모장군에 이르렀다. 5臣 가운데 가장 현달한 집안은 셋째 예신(禮臣)의 문중이었다. 장자 몽윤(夢尹)은 장단부사(長湍府使)에 이르고 증직제학이었으며 차자 몽량(夢亮)은 우참찬에 이르렀으며 저 유명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바로 몽량의 네째 아들이다. 4신 지신(智臣)은 선무랑에 그쳤으나 율곡과 도교(道交)를 맺었었고 5신 신신(信臣)의 아들 희관(熙寬)은 가선대부였고 증손 무춘(茂春)은 어모장군이었으며 현손 덕수(德壽)는 공조참의였고 5대손 세훈(世薰)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었다.

나.백사집
앞서 잠시 언급한 [백사(白沙)집]은 예신(禮臣)의 차손인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의 가계(家系)를 가리키는 말이다. 공은 임란 중에는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아 왜노(倭奴)의 침략을 승리로 이끌었고 난후에는 호성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니 "때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므로 그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 의 당(黨)' 이라는 혐의를 받으니 자진하여 영의정을 그만두었는데,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거듭 불렀으나 '성만(盛滿 - 벼슬과 명예가 가득함)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도리' 라 하며" 선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양하여 ‘대신(大臣)의 풍도(風度)’를 보였다. 공의 현손 광좌(光佐)와 태좌(台佐)는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고 태좌의 아들 종성(宗城)은 영의정이었으며 6대손 경일(敬一)도 좌의정이었고 9대손 유원(裕元)은 영의정이었다. 광좌(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광좌의 8촌형인 태좌(台佐) 또한 소론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3종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종성(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오천(梧川) 종성(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 莊獻世子) 묘정에 배향되었다. 오천은 영조 3년 증광문과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도승지(都承旨)·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영조 29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원(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당했다가 대원군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捕)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등 저술을 남겼다. 역시 9대손 유승(裕承)은 좌찬성이었는데 6형제를 두었던바 건영(建榮)·석영(石榮. 유원의 아들로 출계)·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始榮)·소영(韶榮)이었는데,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6형제가 함께 솔가 망명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특히 회영과 시영은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시영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재무총장·의정원장을 맡아 일본의 박해 속에서 임정을 지켰으며 광복 후에 5형제를 이국(異國)의 땅에 묻고 참담한 심경으로 홀로 환국한 시영은 국명(國名)을 ‘대한(大韓)’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하는 등 정부수립을 주도하고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임기 1년을 남기고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맞서 사퇴하고 이듬해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성원에 못이겨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