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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소개

시조이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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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중흥조(中興祖) 열헌공(悅軒公)과 두 편의 하시(賀詩)

3) 장자 인정(仁挺)과 그의 아들

인정(仁挺)은 호를 성암(誠菴)이라 했는데 일찍이 문과에 장원하고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충렬왕 2년에 우정언으로 있을 때 임금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벼슬을 주려하므로 서명을 하지 않아서 임금의 노여움을 샀다. 뒤에 누진하여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에 공(功)이 없이 벼슬을 받는 자는 모두 서명을 하지 않으니 임금의 미움을 받아 파직이 되었다가 참지정사 이지저의 변호로 복직되었다.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공(公)은 굴강하야 모든 사람들이 벼슬을 받을 때에 반드시 그 공과(功過)를 따져서 처결할 뿐 (왕명이라 하여도) 구차하게 서명하지 않았다”고 있다. 불서고신(不署告身.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는 일)으로 누차 왕의 미움을 샀으나 굽히지 않으므로 그 곧은 성품을 세상사람들이 칭송하였다. 공의 차자 규는 덕원부사(德原府使)를 거쳐 우헌납에 이르렀는데, 충숙왕 원년에 임금이 “상왕(上王. 충선왕)이 평소 총애하는 승려 경린(景麟)과 경총(景聰)에게 벼슬을 내리려 할 때에 우헌납 이조은(李朝隱. 공의 이름)이 서명을 해주지 않아서 조홀도(祖忽島)로 유배되었으나 이제 조은을 불러서 다시 벼슬을 주라.”고 하였다. 공은 간원(諫院)에 있는 동안 위로는 임금의 잘못은 반드시 깨우쳐드리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간사한 작태를 억눌러서 아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부자가 모두 강직한 충신들로서 왕의 위엄에도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