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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소개

시조와 그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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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시조 알평공의 6가지 사적(史蹟)

첫째는 [사로국(斯盧國)]을 탄생시킨 일을 들 수가 있다. 둘째는 [화백 제도]를 창안하여 전통화했다는 것이다. 세째는 [한가위(秋夕)]가 알평공의 마당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유리왕 9년에는 “6부를 둘로 나누어 각각 왕녀에게 거느리게 하고 7월 16일부터 길삼을 하게 하여 8월 15일 그 결과를 심사하여 진 편에서 이긴 편에게 음식을 대접했는데 그때에 진 편의 한 여인이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를 “회소 회소(會蘇 會蘇)” 라고 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슬프고 고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노래를 [회소곡(會蘇曲)]이라고 불렀다. 뒷날 이 잔치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고 있다. [가배]는 뒷날 [ㅂ]이 탈락하여 [가배→가애→가우→가위]로 와전(訛傳)하여 오늘날의 [가위]가 되고 이것이 [한가위] 곧 추석(秋夕)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알평공의 집 마당에서 [한국의 한가위]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넷째는 유두(流頭)의 풍속이 알평공의 영지(領地)인 알천(閼川)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삼국유사」에는 건국회의가 열리던 날 6촌장들이 각각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에 나왔다고 했는데, 이 날은 3월 1일의‘계욕일’ 이므로 전 6촌민이 물가에 나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며 빨래도 하고 겨우내 정체(停滯)되었던 때와 불운을 몰아내고 깨끗한 심신으로 새봄을 맞는 의례(儀禮)를 치룬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이 [계욕]의 민속은 없어지고 그 대신 [유두(流頭)]로 대체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유두’의 원형으로서의 ‘계욕’ 이 기원전 69년에 이미 알천에서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일이다. 다섯째는 박혁거세가 6촌 가운데 알평공의 영지인 양산촌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6촌은 일종의 부족국가였다. 모든 문제는 6촌장이 모여서 의논하지마는 두 가지 한계는 분명히 고수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하나는 종족의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역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다른 촌의 영역을 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촌을 바라보니 양산촌의 나정(蘿井) 곁의 숲 사이에서 말 울음소리가 나므로 가서 살펴보니 알이 있으므로 알을 깨고 영아를 거두어다가 길러서 10여세가 되자 임금으로 세웠다고 하였다.

6촌의 영도자는 알평공인데 제2촌의 촌장이 제1촌의 촌장이요 6촌의 영도자인 알평공의 허락 없이 양산촌에 몰래 숨어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또 나중에 임금이 될 영아를 양산촌장의 허락 없이 거두어다가 몰래 길러서 임금으로 추대할 수가 있을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고쳐 쓰고 있다. “(건국회의를 마치고 모든 촌민이) 알천(閼川) 언덕에 올라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촌의 나정 곁에 전광(電光)이 드리웠으므로 모두 내려가서 살펴보니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니 옥동자가 나오므로 동천(東泉)에 씻었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다. 때 마침 알영(閼英) 우물가에 나타난 계룡에게서 여아(女兒)를 얻었으므로 6촌민들이 궁실(宮室)을 지어서 두 성아(聖兒)를 기르고 13년 뒤에 혁거세는 임금으로 추대하고 알영은 왕비로 모셨다”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보다 136년 뒤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빠진 것을 보태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역사서다. 그러므로 “박혁거세를 소벌공이 데려다가 길렀다”는 「삼국사기」의 잘못된 기록이 「삼국유사」에 의해서 이미 이와같이 분명히 고쳐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째는 알평공이 내려온 밝바위(瓢巖)가 [밝사상] (단군신앙)의 “남부연원(南部淵源)의 구실” 을했다는 점이다. ‘밝사상’은 신라만의 독점물은 아니지마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까지 모조리 멸망했으므로 단절의 위기를 만났었는 데 신라가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서 고려에 전수하고 고려가 다시 조선에 전해주어서 오늘에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최초의 구실을 한 것이 양산촌이고 그 상징적인 표상이 바로 [밝바위(瓢巖)]인 것이다. 박혁거세의 ‘박’ 을 비롯하여 ‘빛’ 과 ‘밝’을 의미하는 용어를 신라의 왕명(王名)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례는 도처에서 산견(散見)된다. 이상과 같이 알평공이 다스리던 알천양산촌은 대저 6가지의 대단한 사적(史蹟)을 지닌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